수사기관의 조서작성 과실에 국가 배상책임 최초 인정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수사기관의 일방적인 조서 작성으로 성폭행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한 10대 남학생들에게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진다는 판결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29일 성폭행 혐의로 구속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10대 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모(사건 당시 15세) 군 등 중학교 선후배 4명은 2010년 7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지적 장애가 있는 A(당시 18세·여)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같은 해 10월 2일 구속됐다.
당시 법원은 경찰이 작성한 자백진술 조서를 근거로 김군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경찰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A씨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들이 진술을 번복함에 따라 20여 일 뒤인 10월 29일 김군 등에 대해 석방했다.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이어가던 검찰은 이듬해 1월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는 사건 관계자들의 일부 자백과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피의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증거도 없다"며 이들을 무혐의 처리했다.
이에 김군 등과 이들의 부모는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는 경찰의 진술조서 조작과 부실한 수사 때문이라며 국가는 재산적·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금으로 김군 등 10대 4명에게 3천만원씩, 부모들에게 500만~1천만원씩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다.
법무부(국가)는 자백 취지 자체를 조작하지 않았으며, 김군 등이 조서 내용에 서명·날인한 점을 들어 직무상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경찰의 조서작성 과실을 인정했다.
경찰의 구체적인 질문에 단답형으로 한 대답이 대다수임에도 문답의 내용을 바꿔 기재함으로써 김군 등의 자발적인 자백 진술을 받은 것처럼 조서를 작성한 과실이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문답의 내용을 바꿔 기재해 마치 자발적으로 구체적인 진술이 나온 것처럼 김군 등에 대한 조서를 작성해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과실이 인정되고 이는 영장실질심사 단계에서 김군 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만 "경찰이 고의로 증거를 조작했다고 평가하기 어렵고 김군 등을 구속한 데에는 진술조서 말고도 다른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된다"며 배상액을 김군 등 4명에게는 300만원씩, 부모들에게는 100만원씩으로 정해 배상 책임을 제한했다.
이 같은 판결은 항소심과 대법원에서도 유지됐다.
대법원은 "수사기관은 수사 등 직무를 수행할 때에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공정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특히 피의자가 소년 등 사회적 약자인 경우에는 방어권 행사에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 세심하게 배려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이러한 의무를 위반해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함으로써 피의자의 방어권을 실질적으로 침해했다면, 국가는 그로 인하여 피의자가 입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성폭력범죄가 진술증거에 의존하는 측면이 큰 점, 피의자가 소년인 경우 방어권 행사에 더 어려움을 겪는 점, 이들 중 일부가 1회 조사에서 범행을 인정한 것 이외에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해온 점 등을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수사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에 있어 직무상 의무위반과 관련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사실상 최초의 선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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