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도전과 성장. 그 강박에 중독된 제 자신이 종종 너무 힘겹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 이렇게 살아가겠죠. 때론 실패하고, 또 때론 성공하고...."
파고들수록 더 어렵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조심스럽다. 배우 유아인에게 있어 연기가 그런 작업이다. 데뷔 19년이 됐어도, 결코 자만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연기를 보는 시선은 주관적이다. 아무리 대단한 열연을 펼쳐도, 만인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건 배우의 숙명이자 과제다.
그래도, 유아인에게 있어 변치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연기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이다.
"같은 순간도, 어떤 분은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세요. 어떤 분은 '유아인 늘 똑같아!' 라고 하시죠. 당연한 거에요. 다만, 제가 노력하고 있다는 점.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해요."
'디스패치'가 유아인과 최근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넷플릭스 '지옥'을 연기하며 느낀, 그 치열한 고민을 들어봤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유아인이 생성해낸, '정진수' 캐릭터
유아인 표 사이비 의장은 강렬한 충격이었다. 흔히 상상하는 카리스마 교주가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덤덤하고 차분하게 (폭력적인) '새 진리'를 설파한다. 그러다가 퇴장 시, 광기를 폭발시킨다.
유아인은 "정진수는 미스터리한 작품 속에서, 미스터리 그 자체를 담당하는 인물이다. (시청자가) 내면을 끊임없이 추측하게 만들며 극의 몰입감을 생성해야 했다"며 "그래서 내면 그 자체가 드러나는 표현을 지양하고 경계하려 했다"고 밝혔다.
"카리스마 하면 쉽게 떠오르는 표현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피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선입견을 살짝 비껴가면서, 또한 캐릭터성을 유지하며, 의외로 신선함을 주려고 했습니다."
정진수라는 인물을 더 깊게 파헤치려면,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했다. "실은 어떤 나약함과 연약함의 발현이 바로 정진수라 생각한다"며 "그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신념어린 척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궤변이다"고 분석했다.
"정진수는 한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물입니다. 외로움과 고독, 절망감 등을 파괴적으로 표현하고 있죠. 그에게 있어 선, 악, 정의 등은 모두 자기 합리화의 영역에서 이뤄집니다. 공포의 근원을 따지고 선동하면서도, 정작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죠."
◆ 유아인이 풀어주는, '연기' 비하인드
유아인이 소름 돋는 연기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연상호 감독의 공도 있다. 연 감독은 디테일한 디렉팅보다는 배우의 자율에 맡기는 타입. 유아인에게도 "알아서 잘 해 주실 것 아니냐"며 미소를 보였다. 자연히, 책임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연 감독님께서 아무래도 배우에게 주는 어마어마한 부담과 짐이 있습니다 (웃음). 그걸 좀 도발적으로 느꼈죠. 그래서 더 애쓰게 됐어요. 제가 그간 선이 굵은 캐릭터성이 도드라진 인물들을 연기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잖아요? 그 강렬한 에너지를 (정진수를 통해) 어떻게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래서 탄생한 신이 바로 3회의 역동적인 퇴장이었다. 진경훈(양익준 분) 형사와 대치하며 A4 용지 2장 분량의 독백을 소화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연 감독이 촬영 당일 대본 수정본을 전달했다는 것. 유아인은, 원 테이크로 이 신을 해냈다.
"사전에 철저하게 계산하거나 대본을 달달 외우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변화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여기서 터뜨려 달라'고 한 부분이 제 생각과는 조금 달랐어요. 그래서 자연스러움을 고민하며 연기해나갔죠. 이 신을 소화하며 '뭔가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유아인은 "실은 제가 보기엔 어떤 흠결도 있고, 순간 순간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다시 가고픈 의지도 있었다"면서도 "그냥, 그런 오류나 실패조차도 정진수의 성격으로 수렴하더라. 그걸 완성하는 유아인의 의지들이 강하게 발현됐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 유아인이 해석하는, '지옥'의 메시지
'지옥'을 정주행하고 나면, 수많은 의문이 떠오른다. 정의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으로 구분하나? 심판을 내리는 존재들은 선한가? 악한가? 지옥은 어디인가? 부활의 의미는 뭘까?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유아인이 보는 '지옥'은 어떤 작품일까?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제가 정의를 하면 정진수가 되니, 정의하지는 않겠다"면서도 "하지만 추측은 해보겠다. '지옥'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인간의 마음을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인간이 그려내는 어떤 이미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론 지옥이기도 하고, 때론 천국이기도 한 그런 순간들이요. 덧붙여, 지금 우리가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리는 작품들에 열광하지 않나요. 우리가 상상하는 부정적 세계와 현실이 더 닮아가고 있지 않나 감히 생각해봅니다."
특히 '맹신'을 예로 들었다. "'지옥'에선 믿음을 갖고 '나만이 정의다'를 외친다. 그러면서 폭력적 모습이 나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언뜻 보였다"며 "어떤 정보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맹신해버린다. 그걸 통해 안정감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이 보였다"고 전했다.
유아인 역시 시즌2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지옥과 천국이라는 개념에서 탈피한 제 3의, 제 4의 세계가 등장하면 좋을 것 같다"며 "천사, 악마, 저승사자 등을 떠나 4차원의 존재가 현실로 개입하면 어떨까. 정진수도 꼭 살아났으면 한다.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 유아인이 살아가는, '배우'라는 직업
30대 남자 배우 중 유아인은, 독보적이다. 탄탄한 연기력, 특유의 유니크한 캐릭터성, 강렬한 존재감…. '지옥'을 통해서도 믿고 보는 배우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국내에선 "유아인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호평이, 해외에선 "대단한 배우"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의외였다. 그는 "사실 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토로했다. "연기를 오래 하고 많이 한다고 좋아지는 것 같지 않지 않다"며 "많은 분들이 박수 쳐 주시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생겨난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머리를 싸맸다.
배우로서의 과제들도 계속해서 생겨났다. "좋은 연기에 대한 연구 뿐만 아니라, 제 이미지에 관한 선입견을 갖고 계신 분들과의 호흡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다. 또 외국 관객들께는 어떻게 깨끗한 표현을 전달할 수 있을지 여러 고민이 뻗어나가는 중이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더 채찍질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어쨌든, (연기는) 자기가 고민하고 애쓰는 만큼인 것 같다. 그게 버겁더라도 고민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며 "스스로 한계에 도달한 순간, 그걸 부수려는 강박 속에서 끊임 없이 도전을 이어가려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건, 제 마음의 끌림에 가장 근접하게 인물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때론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너무 강렬하게 느껴져서, 계속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하고 있어요. 실망 드리지 않으려고요."
<사진제공=넷플릭스>